프롤로그
속세와 성역의 경계에 있는 다리
타나아미 케이이치
어둑어둑한 강변에 눈이 뒤집힌 상태의 목이 놓여 있다. 절단된 여자의 목에서는 대량의 피가 뿜어나와 주변 풀숲이 혈흔으로 물들었다. 카메라를 천천히 뒤로 빼면 위쪽에 무지개다리가 비치고, 그늘진 다리 아래 무참한 목이 보인다.
내가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본 영화의 한 장면이다.
제목과 내용은 다 잊어 버렸지만, 흑백 사극이었던 것 같다. 단, 신기하게도 무지개다리는 새빨간 색이었고, 여자 목에 묻은 피 색깔도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모노크롬 영화라서 보일 리 없는 무지개다리의 적색이 내 기억에 달라붙어 떠나질 않는 것이다.
도쿄 전역이 대공습을 당했던 시절, 우리 가족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우리 집에서 지척에 있는 방공호로 피신했다. 심야의 공습은 칠흑같은 어둠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바꾸고, 열풍과 무언가 타는 이상한 냄새가 내 몸에 들러붙어 떠나질 않는다. 밤 하늘 전체를 뒤덮는 진홍빛 화염이 거대한 무지개다리처럼 반원을 그리며 아른아른 일렁인다. 불덩어리가 마치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답고 애처로웠다. 폭격기가 지나가고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으면 나는 엄마와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방공 두건을 쓴 남자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는 곳을 엿보니, 눈이 뒤집힌 채 이를 악문 창백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긴 머리가 뱀처럼 목 주변에 빙 휘감겨 있어서 머리가 절단되어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생에 미련을 남기고 죽은 여자의 표정은 화염에 반사되어 일그러지고, 나를 향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후년에 무심코 본 카츠시카 호쿠사이 화집에서 《살아있는 머리》(1842년)라는 제목의 으스스한 그림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본 죽은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소름이 끼칠 정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내가 어린 시절 정신없이 논 비밀 놀이터는 1931년경 메구로역 근처에 세워진 연회장 메구로가조엔이다. 천정에서 벽, 계단에서 미닫이문에 이르기까지 극채색 일본화와 조각으로 가득 메워져 있어 ‘쇼와의 용궁성’이라 불리었다.
내가 다녔던 교닌자카 유치원 옆에 있던 가조엔은 어린 시절 내게 있어 ‘꿈의 낙원’ 그 자체였다. 누구나 자유로이 놀게 해줄 만큼 도량이 넓었고, 인간미 넘치는 직원이 있던 개축 이전의 연회장 시절 얘기이다.
내부 모습과 건축 구조 등은 전혀 기억에 안 남아 있지만, 회화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활짝 핀 벚꽃 앞에 선 화사한 일본 전통복 차림 여인들의 흥취와 거북이 등에 탄 우라시마 타로의 늠름한 표정 등은 확실히 기억난다. 그 가운데 요염한 일본 머리와 각양각색의 기모노 차림을 한 게이샤들이 모인 긴 가로식 그림이 있었다. 화면 중앙에 새빨간 무지개다리가 그려져 있는데, 극채색과 다리의 불록한 질감에 사로잡혔는지 나는 그 그림을 아주 좋아했다.
아이였던 내가 왜 그 다리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다리 표면에 두껍게 칠한 붉은 그림물감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개축된 가조엔호텔 화장실을 살펴보면, 한 가운데 어울리지 않는 무지개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 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쓸데없는 다리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 살짝 만진 약간 덜 마른 붉은 그림의 재질감을 떠올리곤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공습날 밤에 본 죽은 자와 무지개다리, 이 기이하고 극적인 배합은 다리 너머 건너편에 있는 이 세상과는 별개의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무지개다리는 에도의 기이한 다리라 불리우며, 호쿠사이가 『지방명교기람』(1833‒1834년)에서 그린 《카메이도 천신 무지개다리》이다. 단순명쾌한 구조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반원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또, 가마쿠라 시대의 작품으로, 아미타불 곁으로 이끄는 극락정토의 다리 《이하백도도(二河白道図)]》(13-14세기)도 흥미로운 다리이다. 이승과 저승의 교량이며,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민중에게 사바 세계와 정토 사이에 끼어 있는 백도를 사용해 번뇌를 이겨내는 신심의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소가 쇼우하쿠의 《석교도(石橋図)》(1779년)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공포스러운 기상천외한 그림이다. 몰려든 수백 마리의 사자떼가 앞다투어 벼랑을 기어올라 하늘에 우뚝 솟은 무지개다리를 본뜬 돌다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이를 보는 인간은 화면에 빨려들어 낙하하는 사자와 함께 공간을 떠다니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다리 끝 바위를 보아도 다 건넌 사자는 한 마리도 없다. 영원히 계속 떨어지는 사자떼의 끝없는 둥근 고리가 ‘건널 수 없는 다리’라는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듯한다.
아득한 옛적, 다리 밑에는 ‘좌우간 다른 세계가 있다’는 통설이 있었다. 카와라모노(강변 것들)이라는 말이 있듯, 예능과 강하게 결합되었으며, 다이도게이(거리 공연)에서 가부키에 이르는 모든 예능이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강변 거지라는 천시하는 호칭도 존재했고, 연극의 발전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녔다. 현실이 아닌 별세계이자, 모든 제도와 질서에서 배제된 이세계라는 개념도 있었다.
괴상하고 음산한 가설 흥행장이 늘어섰고, 해골 목이나 뱀여자, 난쟁이같은 희한한 것을 다루어 사회의 뒷면을 조명한 구경거리가 어둑어둑한 곳에서 술렁거렸다. 또, 다리라는 지붕으로 덮인 이질적 공간은 시체를 숨기는 장소이자, 몸을 파는 창녀들의 숨겨진 집합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심끝에 결정한 남녀간의 극한 상황의 이별, 다리 난간에서 몸을 던지는 안타까운 동반 자살 등 다 죽음과 아주 강하게 결부되는데, 이는 일본의 다리가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근년 몰두하고 있는 다리를 주제로 한 작품은 다리가 갖는 조형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불가사의한 일화나 전설로 수놓인 역사가 배경을 이룬다. 《이하백도도(二河白道図)]》에 나오는 차안과 피안을 잇는 흰 길. 이 길은 다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차안과 피안의 교량으로 인식된다. 서양에는 없는 개념이다. 다리가 내포하는 심원하고 신비한 세계는 내게 복잡하고 괴이한 수수께끼를 던진다.
속된 것과 신성한 것의 경계이자, 이승의 세계와 사후의 세계를 가르는 것이 다리라면, 이는 한편 만남의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다리 건너편에서 어렴풋이 울리는 노랫소리는 누가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을 밝히고 싶다.
다리 밑에 고요히 퍼지는 무한한 어둠, 끝없는 비밀을 간직한 신비로운 이질적 공간에 대한 관심은 그칠 줄 모른다.
이번에 전시되는 내 최신작중 하나인 《백 개의 다리》는 다리를 주제로 삼은 설치미술이다.
호쿠사이가 그린 이색적인 도감도중 한 장인 『지방명교기람(백교일람)』(1823년)에서 제작시 힌트를 얻었다.
면밀하게 묘사한 다리 형태와 구조도 훌륭하지만, 무지개다리, 현수교, 가파른 바위 산에 놓인 다리 등 상상을 초월한 다리 경관에 압도된다.
‘어느 가을날, 벽에서 이런 환영을 보았다’는 호쿠사이의 몽상적인 뇌 안을 엿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