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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가이드

<프롤로그> 속세와 성역의 경계에 있는 다리

‘타나아미 케이이치 기억의 모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음성 가이드 내비케이터를 맡은 셀레이나 앤입니다.
지금 당신의 눈 앞에는 변형되서 겹쳐 쌓인 무지개다리가 보일 것입니다. 타나아미 케이이치가 이 전시회를 위해 제작한 신작 설치미술 《백 개의 다리》입니다.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그 비밀을 푸는 큰 열쇠는 바로 타나아미 자신의 기억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전쟁체험이죠. 공습을 받아 불타오르는 하늘에 시뻘건 화염이 다리처럼 아치 모양을 그리며 보였던 기억. 혹은 유치원 방과후에 놀던 결혼식장 ‘메구로 가조엔’에 시뻘건 무지개다리가 걸려 있던 기억.
나아가, 다리와 연관된 여러가지 이미지들. 다리 밑에서는 과거에 권력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별천지가 펼쳐졌습니다.
타나아미 자신도 또한 ‘다리란 이 세상과 저 세상, 세속의 것들과 성스러운 것들을 연결하는 것. 그 너머의 이질적 공간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억에 지금까지 보거나 들은 이미지를 종횡무진하게 콜라주해 자신만의 별천지를 표현하는 수법으로 타나아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는 우리들의 일상세계와 타나아미의 작품, 우주를 연결하는 신비로운 가교입니다.
자, 타나아미 케이이치의 ‘기억의 모험’을 위한 장대한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

<1장> NO MORE WAR

색채와 약동감이 넘치는 수많은 그래픽들. 타나아미 케이이치가 1960년에 제작한 작품들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재건을 이룩한 도쿄에서 소년만화와 미국 대중영화에 설렜던 타나아미 소년. 마침내 화가를 지향하지만, 어머니가 ‘그림쟁이로는 먹고 살 수 없다’며 반대해 현재의 무사시노미술대학인 무사시노미술학교 디자인과에 진학합니다. 시노하라 우시오, 아카세가와 겐페이 등 같은 세대의 예술가들에게서 자극을 받으며 재학중에 제작한 포스터 수상을 계기로 그래픽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의 문화가 꽃핀 시대입니다. 타나아미도 그 열기를 흡수하며 팝아트를 의식한 포스터와 아트북을 제작합니다.
또, 디자인이 ‘응용미술’이라 불리우며 ‘순수미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타나아미는 인쇄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아트의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1968년에는 《NO MORE WAR》이란 제목의 작품이 미국의 반전 포스터 공모기획에 입선됐습니다. 그는 디자인으로 실적을 쌓으며 미술작품 제작에도 열정을 쏟았습니다.
아트와 디자인을 초월한 실험적 활동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장> 허상 미래 도감

『허상 미래 도감』——. 왠지 야유하는 듯한 느낌이 담긴 말입니다. 이는 타나아미 케이이치가 1969년에 출판한 한 권의 비주얼북 제목입니다.
광고와 신문 등 세상에 넘치는 허상적인 이미지들을 조합시켜 인쇄 매체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디자인과 아트, 분야에 얽매이지 않는 타나아미의 사회에 대한 자세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1970년에 타나아미는 실험영화와 음악, 만화 등의 본고장인 뉴욕을 처음으로 방문해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체험합니다. 그 곳에 넘쳤던 것은 인쇄물과 영상, 라이브 퍼포먼스 등 사회의 상식을 깨는 수많은 과격한 매체 표현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타나아미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와 포르노 신문들을 사 모아 이를 소재로 삼아서 콜라주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실은 콜라주도 타나아미의 특징적 기법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질적인 그림체들이 어우러져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재미에 푹 빠져 개인적인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한편, 1975년에는 아트 디렉터로 일본판 월간 잡지 『PLAYBOY』의 창간에 참여했습니다. 사진가와 일러스트레이터를 기용해 참신한 비주얼로 100만부라는 매출부수를 달성했고, 스스로 콜라주도 제작했습니다.
동서고금의 이미지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타나아미의 솜씨. 그 조용한 즐거움이 절절히 느껴지는 듯합니다.

<4장> 인공적인 낙원

갑자기 질문 하나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은 환각 증상을 일으킨 적이 있나요?
여기에 나열된 것은 타나아미 케이이치가 198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입니다. 학과 거북이, 소나무, 달과 물결 등 과거의 팝아트같은 분위기와는 싹 달라져 참으로 불가사의한 모티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81년, 타나아미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너무 바쁜 생활로 인해 폐에 물이 차서 가슴이 답답해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던 나날들. 고열에 시달리는 가운데,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는 흐늘흐늘 일그러지고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어린 시절의 기억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는 꿈인지 생시인지…4개월간에 걸친 입원생활중 타나아미는 눈 앞에 떠오른 비전들을 노트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의식속 깊숙한 곳에서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괴이한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이는 타나아미의 인생관을 뒤흔드는 중대사였습니다. 마침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 학과 거북이, 불로불사의 신선들이 노는 낙원 세계 등을 둘러보고 이국적 모티프에 관심을 가졌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타나아미는 생과 사, 자신의 기억과 마주하며 판화와 회화, 입체작품 등 다양한 기법으로 정신세계의 비전을 표현하고 조합하며 변형시키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타나아미가 ‘인공적인 낙원’이라 부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내면의 비전. 환각과 현실이 뒤섞인 전망을 천천히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5장> ‘기억을 더듬는 여정’ 

굽이치는 선으로 그린 달팽이와 거북이, 코뿔소, 긴 코와 커다란 귀를 지진 코끼리같은 사람들——. 이는 타나아미 케이이치가 평소에 지속적으로 그리는 드로잉 작품들입니다. 그린지 어언 수십년.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1990년경부터 타나아미는 저녁식사를 마치면 자택 쪽방에 틀어박혔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불러일으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혼돈속의 기억들을 그림으로 남겨 시간의 흐름을 파악했습니다. 마침내 자유자재로 과거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게 된 타나아미는 그런 감각을 영화 『백 투 더 퓨처』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타나아미가 일과로 삼은 것은 꿈 일기였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묘우에 쇼우닌은 꿈을 기록하다 보니 마음 속에 떠올린대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얘기에서 자극을 받은 타나아미는 매일 밤 꼬박꼬박 꿈 일기를 썼는데, 10년이 지났을 무렵, 몸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더 격렬하고 재밌는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 잠을 푹 못 자게 된 것입니다.
기억과 꿈, 명작 모티프 등이 뒤섞여 자아내는 비전. 당신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나요?

<7장> 아르침볼도의 미궁

전시실 중앙에는 사람 얼굴 모양의 오두막집이 보입니다. 그중 하나는 포도와 배같은 과일과 야채가 조합된 얼굴입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실은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그린 트릭 아트의 오마주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타나아미는 ‘쇼와의 용궁성’이라 불린 메구로 가조엔과 아르침볼도의 작품 등 복잡하고 기괴한 발상의 산물들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들 속에 표현된 것은 인간의 경이로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미궁.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탐색하는 흥분이 뒤섞여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합니다.

또 타나아미는 자신의 이미지로 미궁을 창조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비밀을 살짝 보여 드릴께요.
타나아미의 아틀리에를 모방한 오두막집에 배치된 것은 ‘지정지’라 불리우는 그래픽 디자인 설계도입니다. 타나아미는 거기에 드로잉 복사지와 함께 색지정 칩들을 붙입니다. 이를 조수가 컴퓨터로 옮겨 데이터를 작성합니다.
하지만, 이 원화 단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색상을 칠하지 않았습니다. 타나아미의 머릿 속에서는 완성된 구도가 ‘보이지’만요.
정말 놀랄만한 상상력의 힘. 완성된 포스터 작품과 꼭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8장> 기억의 재구축

타나아미 케이이치의 ‘기억의 모험’을 위한 장대한 여행. 시대는 2000년대에 접어들었습니다.
환경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계기를 이룬 것은 바로 젊은이들의 재평가였습니다. 패션이나 음악과의 콜라보레이션이 늘자 타나아미의 이름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잡지와 웹 매거진 취재도 증가하는 가운데 타나아미는 자신의 창작기법에 관해 ‘꿈과 기억의 이미지를 조합해서 편집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편집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그 배경에는 ‘인간은 무의식중에 기억을 변조하며 살고 있다’는 심리학 이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공습중의 화염과 조명탄 빛 속에서 할아버지가 키웠던 금붕어 비늘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기억은 무엇일까? 그 수수께끼를 풀려는듯 타나아미는 금붕어를 반복적으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대에는 이 기억들의 단편과 잡지, 미국 만화책 스크랩을 종횡무진하게 조합시킨 작품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흡수한 이미지들을 압도적인 밀도로 콜라주하는 기법은 평면에 국한되지 않고 입체와 영상작품에도 공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타나아미에게 있어 제작이란 기억과 기억을 붙여 맞추고 덧칠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작품을 보는 시각이 부쩍 깊어질지도 모릅니다.

<9장> 피카소의 기쁨

벽을 가득 메운 수많은 페인팅——. 이는 그가 2020년부터 4년동안 그린 작품입니다. 게다가 모두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모티프로 삼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도 피카소만 그린 것일까요? 그 힌트는 2020년에 시작된 지구촌 규모의 대사건——, 바로 코로나19와 관련된 일입니다.

젋은 시절 때보다 더 해외 전시회와 콜라보레이션 기획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타나아미. 그런데, 외출 금지와 국경 봉쇄로 인해 모든 프로젝트가 갑자기 중단되었고, 타나아미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과거에 제작한 『우주소년 아톰』을 피카소의 모자상에 빗댄 작품이었습니다. 학창시절처럼 모사라도 해 보자. 그런 생각이 들어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의외로 재밌어 푹 빠졌습니다.

목적도 마감일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혼자 마음을 비우고 모사하는 나날들. 그러다가 마침내 원작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변경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린 그림수는 무려 700장 이상이나 됩니다.
8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연 뜻밖의 새로운 경지——, 고독에 잠겨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깨우치고 앞으로 더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 타나아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품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10장> 맥의 부적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만일 당신의 꿈속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생물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즐거운 꿈이라면 좋겠지만 나쁜 꿈은 꾸고 싶지 않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옛날 일본에서는 꿈을 먹는다는 동물 ‘맥’을 그린 부적을 베개 밑에 깔고 잠을 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꾼 꿈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액막이, 이른바 ‘주문’입니다.

그렇다면 타나아미의 경우에는 어땠을까요? 해골, 독거미, 금붕어와 합체된 여고생 등 작품에 표현된 모티프는 괴상망칙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왠지 밝습니다. 기발하면서도 발랄하고 세련된 느낌……!
실은 이야말로 타나아미 케이이치라는 아티스트의 마법입니다. 전쟁체험과 입원중에 본 환각 등 죽음을 연상케하는 기억과 마주하며 이를 원하는 그림체와 결합시켜 계속 덮어쓰기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산출물은 작품으로 변합니다. 타나아미에게 있어 표현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상적인 ‘주문’일 지도 모릅니다.

미국 전투기와 무지개다리, 이토 자쿠츄의 닭과 여인의 나체……국가와 시대, 생과 사조차 초월해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세계.
기억을 ‘추억’으로 끝내지 않고 점점 새롭게 만드는 타나아미의 뇌 속 우주가 여기에 있습니다.

<11장> 타나아미 케이이치 × 아카츠카 후지오

에도시대 화가 이토 자쿠츄에서 파블로 키파소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이미지들을 흡수한 타나아미 케이이치의 ‘기억의 모험’.
그 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와의 콜라보레이션입니다.

붉은 리본의 마법소녀 『비밀의 앗코짱』. 『천재 바카본』에 등장하는 ‘레레레의 아저씨’와 ‘장어개’. 그 밖에도 ‘셰-!’ 포즈로 인기있는 ‘이야미’와 들고양이 ‘냐로메’ 등이 있습니다.
반세기 이상 인기를 끈 아카츠카 만화의 캐릭터들이 ‘짠!’ ‘보카보캇!’ ‘도가칭!’ 등의 의성어와 함께 타나아미의 모티프와 어우러져 예기치 못 한 합체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는 2022년에 슈에이샤의 그라비아 인쇄기가 국내에서 가동을 종료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언가 기념할만한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은 타나아미가 생각해낸 것이 아카츠카 만화와의 콜라보레이션이었습니다.
실은 소년시절에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타나아미. 같은 세대였던 아카츠카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담아 만화와 잡지 문화를 뒷받침한 그라비아 인쇄의 한계에 도전합니다.

그 성과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기억의 모험왕’인 타나아미 케이이치와 아카츠카 후지오가 최고의 인쇄기술을 활용해 선보인 전대미문의 프린트 아트 작품입니다.
이 때 타나아미는 86세였습니다. 타나아미의 뇌 속에 있는 우주는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요?